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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본문내용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 하셨나이까?”

2018-12-12 13:27:40
설교본문 (눅 2:41~52)
자녀는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닮습니다.



 자녀에게 유아세례를 베푸는 부모님들은 하늘의 축복을 받은 분들입니다. 자녀를 신앙으로 키워 보겠다는 결심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아세례식은 말씀으로 자녀를 양육하겠다고 하는 공개적인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님의 영향력 아래 자라갑니다. 부모의 가치관, 생각, 언어, 행동 양식을 그대로 닮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기도하면 자녀들도 부모님의 모습을 따라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법을 배웁니다. 부모가 말씀을 읽기 시작하면 자녀들도 성경을 펴고 중얼중얼 하면서 성경을 읽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엔 “엄마, 내가 기도할게!” 하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 52절에 보면, 예수님도 어린아이 시절이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함께 그 본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누가복음 2:52)



 예수님도 어린아이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인간으로, 성숙한 인간으로 오신 게 아닙니다. 그래서 키가 자라며 지혜도 자랐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정신적인 세계도 점점 커져 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분 곁에 부모가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가 없이 생존할 수 없습니다. 연약하고 가장 무력한 존재가 어린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부모는 예수에게 언어 교육을 시켰을 것입니다. 성품 교육도 시키고 신앙 교육도 시켰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키가 자라나듯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지혜도 더욱 커져 갔다고 성경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두 살 예수에게 전환기가 찾아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대화 장면이 나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첫 말씀이 오늘 이 본문이기도 합니다. 이때 어린 예수는 어머니께 질문을 던지는 형식으로 첫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시 어린 예수의 나이가 ‘열두 살’이었습니다. 

 주후 1세기부터 유대인들은 성인식을 거행했는데, 남자는 열세 살에 여자는 열두 살에 성인식을 했습니다. 물론 여자가 성인식을 하게 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입니다. 어쨌든 이 성인식을 치르게 되면, ‘바 미츠바(bar/bat mitzvah)’라고 하여 자신이 율법의 아들이 됐다는 표증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아들들은 회당의 정식 회원이 되어 랍비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하며 토론할 수 있게 됩니다. 즉, 부모의 도움 없이도 혼자서 말씀을 읽고 토론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나이가 열두 살 곧 성인식을 치룰 만한 나이였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어머니 마리아와 아들 예수의 대화가 심상치 않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향해 ‘어찌하여’라고 질문을 하고, 아들 역시 어머니께 ‘어찌하여’라고 하며 서로 상충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꾸중하는 것 같고, 또 어떻게 보면 항의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중 48절을 읽어 보면,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라고 돼 있습니다. 상황은 이렇습니다. 유월절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가족들이 전부 올라왔습니다. 그리곤 유월절 의식을 마치고 고향으로 내려가는데, 아들 예수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당시 대규모 단위로 사람들이 함께 움직였기 때문에 아이를 찾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아이 예수가 보이지 않자 부모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하룻길을 올라갑니다. 그러고 나서도 여기저기 찾는 데 또 하루가 지났습니다. 그렇게 사흘 만에 아들 예수를 찾게 됩니다. 그러니 부모 마음이 오죽했을까요? 아마 아들을 보자마자 이렇게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얘야, 네가 없어서 엄마, 아빠가 얼마나 근심하며 염려하며 너를 찾았는지 아느냐? 미리 얘기를 하지 그랬느냐?” 이런 반응은 부모로서 당연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아들 예수의 태도가 놀랍습니다. 마치 어머니께 항의하듯 이렇게 대답합니다. 4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누가복음 2:49)



 아마 어머니 마리아는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는 긍정적인 충격이고, 하나는 부정적인 충격입니다. 46~47절에 보니, 이런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누가복음 2:46~47)



 어린 예수가 성전의 랍비들과 대화하며 토론도 하고 질문도 나누는데, 듣는 모든 자가 그 지혜에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때 어머니 마리아도 깜짝 놀랐습니다. ‘내 아들이 이렇게 컸구나! 내 아들의 지혜와 총명이 이렇게 컸구나! 내 아들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이 이렇게 자랐구나!’ 하면서 대견스럽게 여기고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다른 의미의 충격도 있었습니다. 이제 내 아들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아들이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어찌하여 모르셨습니까?”라고 답변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스럽고 귀엽기만 한 내 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엄마 품을 떠나갈 때가 되었구나. 이제 내 아들이 자신의 생각을 갖고 주체적으로 나아가야 할 때가 되었구나. 그래, 이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지.’라는 생각이 어머니 마리아에게 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녀 역시 아들 예수의 지혜로운 답변에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자녀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자녀들도 그렇습니다. 열두 살이라는 이 나이는 인간의 성격 형성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략 열두 살 전까지 아이는 부모 곁에서 자라납니다. 어머니에게 붙들려 있고 아버지에게 귀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열두 살이 되면서 자아정체감이 확립되고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어머니, 아버지 품으로부터 점점 떠나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손 꼭 붙잡고 부모 곁을 안 떠나려던 아이들이 열두 살 무렵이 되면 부모가 같이 데리고 있으려고 해도 부모 곁을 떠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 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면서도 늘 그들을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내 아들과 딸을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들과 딸에게 너무 집착하는 것은 부모에게 뿐만 아니라 자녀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대신 열두 살이 되기 전까지 마음껏 사랑하면 됩니다. 마음껏 안아주세요. 마음껏 쓰다듬어 주십시오. “네가 있어서 내가 복을 받았다.”라고, “네가 있어서 내가 참 기쁘다.”라고, “내가 너의 부모가 되게 해 주어서 정말 고맙다.”라고 수없이 이야기해 주십시오. 아이가 열두 살이 되기까지 그런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 됩니다. 그리고 그때 그렇게 해 주는 것이 아이와 부모의 친밀도를 형성하는 데도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열두 살 무렵이 되면 조금씩 방식을 변경해야 합니다. 그때 남자아이는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만지는 것도 싫어합니다. 여자아이들도 아빠가 껴안아도 놀라 도망가 버립니다.

 어떤 부모님들 중에는 자녀를 너무 오랫동안 붙들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자녀가 스무 살이 되었는데도, 서른이 넘었는데도, 심지어 마흔이 지났는데도 자녀를 감싸 안고 있습니다. 자녀가 스스로 해야 할 일도 부모가 대신해 줍니다. 너무 많이, 그것도 너무 오랫동안 그렇게 해 줍니다. 혹은 자녀를 너무 강하게 통제하는 부모가 있습니다. 자신의 말에 순종할 때는 그렇게 좋아하다가 조금이라도 자기 뜻대로 하지 않으면 자녀를 미워하면서 거부합니다. 이런 모습은 좋은 부모의 모습이 아닙니다. 

 자녀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지 않는 부모의 사랑은 왜곡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녀를 내 소유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머니들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자식들에게 그렇게 쏟아붓는 사랑, 이제 누구한테 쏟아부어야 할까요? 남편에게 쏟아부어야 합니다. 그러면 가정이 회복됩니다. 자녀들에겐 열두 살까지만 하면 됩니다. 그런 뒤엔 조금 멀리서 자녀를 지켜보면 됩니다. 그리고 대화를 하세요. 내 아들, 내 딸이 무엇 때문에 고민하는지,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어떤 인생을 살고 싶어 하는지 물어보고, 그들이 대답하는 순간까지 기다려 주어야 자녀들이 바르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열두 살이 지났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듯합니다. 그래서 이후 예수님이 어머니를 모시고 서른 살이 될 때까지 가정에 머무르십니다. 누가복음 3장 23절에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라고 돼 있고, 누가복음 2장 51절에는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께서 어머니를 모시면서 서른 세가 될 때까지의 시기를 공생애 사역 준비 기간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른 살이 되자 가정도 내려놓으시고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들은 어렸을 때 많이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있지 마십시오. 저는 기러기 아빠를 볼 때마다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아무리 영어 공부가 중요하고 미국의 교육 시스템이 좋아도, 부모와 함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교육 시스템은 없습니다. 가족은 함께 살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그들을 만져주고 안아주고 또 함께 이야기를 나눠야 가슴이 풍요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곤 자녀가 열두 살이 넘으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길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자율성을 보장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 예수의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들 예수 역시 마지막까지 어머니께 순종하면서 자신의 길을 간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들은 아들과 대화하셔야 합니다. 윽박지르지 말고 소통하며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이 바르게 자라날 수가 있습니다. 열두 살 전까지는 마음껏, 정말 모든 것을 동원해서 사랑하시고, 그 나이가 지나면 자녀의 자율권과 자발성을 존중해 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교육 방법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자라나셨습니다. 오늘 이 어린이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 주위의 어린아이들을 더욱 사랑하며, 또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쓰실 귀한 자녀들로 자라나게 할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말씀 앞에 결단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 깨닫고 결단하며 더 깊이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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