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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본문내용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한 사람

2018-12-12 13:27:40
설교본문 (창 22:1~12)
 렘브란트와 샤갈의‘이삭의 희생’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창세기 22장의 말씀을 그림으로 표현한‘이삭의 희생’이라는 유명한 두 개의 작품이 있습니다. 먼저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아브라함, 아들 이삭과 천사의 모습이 급박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아버지 얼굴은 아주 심각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의 얼굴을 왼손으로 뒤로 젖혔습니다. 이것은 차마 아들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의 입을 틀어막고 오른쪽 손으로 칼을 뽑아들었습니다. 칼로 아들을 베려하는 아브라함의 동작이 멈춰 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제지하기 위해 천사가 급박하게 다가와서 아브라함의 오른쪽 손목을 잡아 칼을 떨어뜨렸습니다. 천사는 왼쪽 손으로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암시를 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손을 멈추라고 하니까 마치 아브라함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알겠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샤갈의 그림에서 아버지의 얼굴은 거의 넋 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아버지의 얼굴과 몸 전체가 붉은색으로 물들어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강렬한 표시입니다. 아버지는 칼을 뽑아들고 아들의 피를 몸 전체로 느끼면서 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아들과 죽음의 심연속의 빠져 들고 있습니다. 이때 위에서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소리칩니다. 왼쪽 저 멀리서 사라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로 그 앞에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어린양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위를 보면 앞으로 2000년 후에 오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자리로 나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의 죽음이 곧 앞으로 2000년 후에 다가올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모형임을 암시해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을 통과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막혔던 가슴을 쓸어내리곤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과 분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질문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죽여서 번제로 받치라고 말씀하실까?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닌가?’ 이 사건을 보면 마치 하나님이 심술을 부리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냉혈한 같이 잔인하기까지 한 분이 아닌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공중에 나는 새도 먹이시고 들에 핀 꽃들도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랑하는 아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라고 요청하시는가? 끔찍한 살인사건을 사주하시는 분이 하나님인가? 언제는 아들을 주시고 언제는 그 아들을 도로 빼앗아가는 하나님인가?’ 

늦둥이 아들을 빼앗아 가시는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이 아니라 저주의 하나님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변덕쟁이이고 심술쟁이신가? 사람들이 당하는 괴로움을 즐기시는 가학주의자인가? 어떻게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으신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사건을 읽을 때마다 번뜩이는 의심과 당혹감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이때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되돌아봐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을 시험을 하셨을까요? 먼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사탄의 유혹과는 다릅니다. 사탄의 유혹은 영어로 하면 ‘temptaion’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험은 ‘test’입니다. 사탄의 시험은 목표가 하나님의 시험과 다릅니다. 사탄의 시험은 처음부터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를 무너지게 하고 파멸로 몰아갑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합니다. 거짓과 악과 부정을 행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다시 우리를 살리려는 것입니다. 시험으로 하여금 우리가 위기에 부딪히는 것은 틀림없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을 통과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성장과 믿음의 진보와 성숙을 기대하시면서 시험하십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실 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참된 마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종교라는 이데올로기로 바뀌는 것을 거절하십니다. 믿음이 종교가 되면 위험합니다. 종교가 교만해지면 인류의 악이 되고 광기를 불러일으키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거꾸로 말하면 모든 정치적인 이념들이 종교화 되면 광신의 위험성을 지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집단화가 되면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집니다. 

우리는 이미 20세기에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히틀러의 나치주의가 독일에서 일어났습니다. 스탈린의 공산주의는 세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고난을 당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크고 작은 정치적 이념들이 우리 삶의 자유와 객관적인 진리들을 무너뜨리는 현실 속에 마주치고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이 쓴 「그 길을 걸으라」는 책에서 우리에게 영적으로 신선한 말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 어떠한 형태로든 종교란(특히 기독교를 포함해서) 폭력, 학대, 미신, 전쟁, 차별, 독재, 교만을 끊임없이 양산하는 번식의 토양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종교와 영성은 우리에게 망상과 기만 그리고 억압을 양산하는 끝도 없는 구덩이와 같다. 그래서 시험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시험하실까요? 하나님은 시험을 통해 우리가 겸손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정말로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 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욕심을 채우는가를 확인하십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고 있는가 아니면 자기만족을 위한 우상처럼 섬기는가를 보십니다. 

우리는 기독교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섬기는 거짓종교로 만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참된 신앙으로 서게 하시려고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유진 피터슨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제시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시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길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시험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시험받지 않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시험받는 믿음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하는 것입니다. 시험은 우리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합니다. 시험은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며 하나님만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러므로 시험 당하지 않는 믿음은 때로 개인적인 망상과 환상 그리고 야릇한 꿈과 자기기만으로 멈추어 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통과하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을 보여주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주실까요?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자랑하고 싶어 하십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신뢰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신뢰하고 자랑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에 대한 모범을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시험을 통과하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이 무엇인지 가르쳐주려고 했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세기 12:1) 



이때 아브라함은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갈 곳을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갔습니다. 자기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만을 바라보면서 떠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축복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세기 12:2)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위험한 모험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실패하면 하나님도 실패하는 것입니다.아브라함이 무너지면 하나님의 존엄성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마음도 조마조마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신뢰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할 것을 믿으면서 그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기대처럼 말씀에 그대로 순종합니다. 



창세기 22장부터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그대로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를 때에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창세기 22:1)



이런 아브라함을 어찌 하나님께서 예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할 때도 아브라함이 그것 때문에 슬퍼하고 탄식하며 하나님을 원망했다는 구절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에 보면 밤잠을 못 이루었을 아브라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창세기 22:3)



아들을 잡아 제물로 들이라고 했는데 아무 말도 없이 새벽 일찍 일어나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땅을 향해서 나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귀의 안장을 지우고 아들 이삭을 데리고 갑니다. 번제에 쓸 나무를 일일이 쪼개어 하나님의 일러주는 곳으로 떠나가는 모습이 동사로 연결되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창세기 22:3)



그리고 마지막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이렇게 행동했습니다.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창세기 22:10)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여길 때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브라함의 순종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은 신앙에 대한 깊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소유물, 축복, 인간관계조차도 하나님께서 잠시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도로 다 가져가실 임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이와 같은 신앙의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간은 내 것이 아니다. 건강도 내 것이 아니다. 생명도 내 것이 아니다. 재물도 내 것이 아니다. 인간관계도 내 것이 아니다. 명예도 내 것이 아니다. 권력도 내 것이 아니다.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잠시 나에게 맡겨 주시고 빌려 준신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과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삶이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부모님이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아내와 남편과 자식이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먹고 살게 해주신 것, 직장과 기업을 주신 것이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명예와 관계할 수 있는 사람들을 주신 것이 감사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나의 나 된 것을 믿음 속에서 고백합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도로 갖고 가실 것입니다. 인간은 온전한 창조주가 아닙니다. 인간은 피조물일 뿐이기에 창조주 되신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아들을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미리 맛보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의 마음을 미리 맛보게 해주십니다. 샤갈의 그림에서 보여준 것처럼 이삭은 2000년 후에 다가올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갈려 돌아가실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가를 아브라함에게 미리 맛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죄 많은 백성들을 위해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할 때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브라함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딸을 먼저 세상에서 떠나보내는 아픔을 갖고 있는 부모님들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을 경험하는 분들입니다. 이런 고통을 당할 때 세상의 어떤 말로 위로해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분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보내는 아픔을 누구보다도 절절하게 경험하신 분들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놓는 사랑을 미리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의 신앙은 놀라운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신앙의 본질을 꿰뚫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어렵게 낳은 아들이 이삭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선물과 축복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선물보다 선물을 허락해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도 무슨 이유인지는 다 알 수가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들을 달라고 하시는지 물어봐도 대답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작정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보다 내 아들을 더 사랑하신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맡기기로 결단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그 모습을 보시면서 손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손에 칼을 높이 들고 내리치려고 할 때 하나님이 다급해졌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천사를 보내서 그의 오른손을 꽉 붙잡았습니다. “됐다.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주려고 했던 마음을 내가 알았다. 네가 참으로 나를 경외하는구나.”하나님께서는 이미 죽은 것과 같은 아들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부활의 기쁨, 생명의 기쁨을 주셨습니다. 죽은 것 같으나 그 속에서 하나님께 맡겼을 때 새 생명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고백할 때 새로운 기회가 열립니다.  



사도바울은 2000년 후 로마서를 쓰면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로마서 4:17) 



아브라함이 가졌던 신앙은 부활의 신앙, 창조의 신앙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고, 죽은 것을 새롭게 살리시는 하나님의 창조와 부활의 역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브리서 11:1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을 신앙의 모범으로 보여주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더 소중한지 묻고 계십니다. 

“네 돈보다 내가 더 소중하냐? 네 명예 보다 내가 더 소중하냐? 네 권력 보다 내가 더 소중하냐? 네가 아끼는 재산보다 내가 더 소중하냐? 네가 정성을 쏟아 부은 자식들보다 내가 더 소중하냐?”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모든 것보다 하나님이 더 크고 소중한 분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꽉 움켜쥐고 있던 것을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며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다시 축복해주십니다. 죽은 자에게 부활을, 병든 자에게 치료를, 절망하고 고통 받는 자에게 새로운 소망과 기쁨의 역사를 일으켜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내 것을 주장할 때가 많습니다.“하나님 앞에 다 내놓더라도 이것만큼은 안 됩니다. 이것까지 내려놓으라고 하시면 제가 쓰러집니다”’우리가 마지막 한 가지를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축복과 생명의 역사를 주시고 싶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순종하는 모습을 통해서 아직도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막힌 것 같을 때, 모든 것이 안 되는 것 같을 때,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을 때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백합시다. “하나님, 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이렇게 고배할 때 생명의 역사와 부활의 권능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다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소중한 것이라고 붙잡았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잠시 주신 선물임을 다시 깨닫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주님께 내려놓고 맡기며 생명의 주님과 더불어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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